인생은 언제나 흐림 뒤 맑음

[수필 예시] 수필 개인 연습작-우기(雨期) / 좋은 수필 예시 / 짧은 수필 예시 / 학생 수필 예시 본문

글짓기/수필

[수필 예시] 수필 개인 연습작-우기(雨期) / 좋은 수필 예시 / 짧은 수필 예시 / 학생 수필 예시

블로그하는봉봉 2019. 6. 22. 20:40

우기(雨期)

매미들이 시끄럽게 소리 지르는 것을 보며 여름이 성큼 다가왔음을 느낀다. 꽁꽁 얼었던 대지가 녹기 시작할 무렵부터 계절이라는 녀석은 단거리 달리기 선수가 되어있는 것 같다. 심판의 총소리를 기다리며 긴장하고 있는 단거리 달리기 선수 마냥 잔뜩 성이나 있어 총을 쏘아 올림과 동시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박차고 나가니 말이다. 올해도 봄은 우물가의 물을 얻어먹으러 온 지나가는 나그네처럼 소리 소문 없이 떠났고, 나는 님을 그리워하는 아낙네처럼 떠난 봄을 그려보았다.

 

사실 여름이 싫은 것만은 아니었다. 여름하면 열대야, 습기 이런 부정적인 단어들이 먼저 떠오르긴 하지만 아직 학생인 나에겐 꿀 같은 여름방학이 있기 때문이다. 방학을 맞아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좋아했는데 사실 집 보다 버스 타는 것이 신났기 때문이다. 집에 가는 날에는 아들을 반기느라 어머니의 손은 분주해졌고 상다리는 오랜만에 힘을 써야 했다. 가족끼리 모여앉아 오순도순 식사를 마치고 나면 나는 냉큼 슬리퍼를 신고는 밖으로 나왔다. 한적한 곳을 거니는 것을 좋아하는 나에게 우리 마을은 더할 나위 없는 장소였다. 적막한 어둠이 낮게 내리 깔리고 나면 터덜터덜 걷는 내 발자국 소리와 함께 스르르 흐르는 강물 소리가 대화를 나누곤 한다. 그날도 발길은 여느 때와 같이 강가로 향했는데 그곳은 여느 때와 같지 않았다. 연일 내린 폭염으로 인해 강가는 간신히 숨을 쉬는 듯 졸졸졸 흐르고 있었고 앙상한 뼈처럼 바싹 마른 땅이 드러났다. 그 위로 솟은 돌에 묻은 흙을 툭툭 털어내고 앉아 보았다.

15년 전에 강가는 깨끗하고 맑았다. 수영을 하지 못하던 나는 거기서 물장구를 치며 놀았다. 하교 종이 울리고 나면 친구들과 우르르 뛰어가서 온몸이 홀딱 젖어 몸이 무거워진 채로 집으로 돌아가던 때가 있었다. 옷에 묻은 모래 때문에 혼이 날까 지레 겁을 집어먹고는 다람쥐처럼 화장실로 쪼르르 들어가서 몰래 모래를 털어놓은 적도 많았다. 사실 어머니가 혼을 낸 이유는 모래와 함께 집으로 돌아온 것이 아니라 수영을 못하는 내가 혹여나 물에 빠질까 걱정해서였다. 하지만 어머니의 걱정을 알리 없던 철없던 꼬마 아이는 그날도 물놀이를 하러 갔었다.

 

호우주의보가 내려 아침부터 회색빛의 하늘은 언제든 세찬 비를 뿌릴 것 같았다. 비내음을 품은 흙 냄새와 서늘한 분위기에 괜히 몸을 움츠리며 등교했는데 호우주의보 덕에 이른 하교를 하게 되었다. 삼삼오오 모여 집으로 발길을 돌리는데 나는 몇몇 친구들의 물놀이를 하자는 유혹에 걸려버리고 말았다. 가방을 벗어던지고 물가로 뛰어 들어가자 큰 비가 오는데도 집에 가지 않은 우리에게 하늘이 노해서 호통을 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우리는 더욱 신나게 놀았다. 그런데 분명 얕았던 물이 순식간에 불어나 있었고 이제 집으로 돌아가자는 친구들의 말에 나도 몸을 틀어 나가려고 했는데 그만 발을 헛디뎌 물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어푸어푸 대며 물을 몇 번 먹고 나니 정신이 아득해져서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누군가 내 허리춤을 잡고 번쩍 들어 올린후에도 나는 멍하니 있었고 친구들의 괜찮냐는 말을 몇 번이고 듣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었다. 나를 꺼내준 아저씨는 우리에게 얼른 집에 가라는 말을 남기곤 옆에 놓인 뜰채를 어깨에 매고 후다닥 뛰어가셨다. 집으로 돌아가 씻고 처음으로 앞이 안 보일 정도의 세찬 빗줄기에 무서움을 느꼈다. 마치 세상의 모든 것들을 집어삼킬 듯이 며칠이고 비가 내리고 난 후 화창해진 날에도 나는 더 이상 물놀이를 하러 가진 않았다.

 

생각의 구름 속을 헤집고는 엉덩이를 툭툭 털었다. 꿉꿉한 공기가 폐부 깊숙한 곳에 가득 차는 것을 느끼며 앙상한 강가를 뒤로하고 걸었다. 왠지 모를 이질감을 느끼며 새로운 풍경들을 눈에 담아 집으로 향했다. 현관에 들어서니 어머니가 “곧 비가 온다네.” 하셨다. 잠깐 눈길이 어머니에게 멈췄다 티브이로 향했다. 곧 한반도에 다가오는 태풍을 경고하는 아나운서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커피 한잔을 타서 베란다로 나가보니 이젠 꿉꿉한 공기가 마을에 그득그득 했다. “한바탕 쏟아 붓겠네.” 청자 없는 혼잣말을 하며 입에 머금은 커피를 삼키고 나니 쌉싸름한 맛이 돌았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