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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과편견 독서 감상문] 소설 오만과 편견 독서 감상문, 오만과 편견 줄거리 알려드립니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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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과편견 독서 감상문] 소설 오만과 편견 독서 감상문, 오만과 편견 줄거리 알려드립니다.

블로그하는봉봉 2019. 11. 23. 23:53

‘오만의 권리’

“다른 경우와는 달리, 그분이 오만한 게 나한테는 그렇게 거슬리지 않아.” “그럴 만한 근거가 있으니까. 가문이며 재산, 모든 것을 다 갖춘, 그렇게 훌륭한 젊은이가 자기 자신을 높이 평가한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잖아. 이런 표현을 써도 좋다면, 그분은 오만할 권리가 있어.” 등장인물 중 샬럿의 대사이다. 이 말을 들은 엘리자베스 또한 샬럿의 말에 동의한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이후부터 인간 사회에 계층이 존재했다. 자로 잰 듯 딱딱하게 그어진 계층 간의 줄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구분하기 시작했다. 보이는 부분을 넘어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도 말이다.

소설 ‘프랑켄슈타인’의 피조물인 불결하고 추한 존재가 떠올랐다. 우리 사회 속 하층민과 빈민층을 대표하는 피조물은 순결하고 고결한 존재인 부유층, 지식층과 대립한다. 프랑켄슈타인은 불결한 존재에게 너는 우리와 다르다고 한다. 보이는 모습이 추하기 때문에 너의 마음 또한 악으로 가득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들의 오만의 권리는 어디서 나오는가? 순결과 고결의 이름은 왜 그들의 소유인가? 자본이라는 개념이 생성된 이후 많은 것들이 편리해졌다. 화폐로 편하게 무엇이든 살 수 있다. 맛있는 음식을 넘어 순결과 고결, 오만할 권리까지도 말이다.

순결과 고결의 피를 마신 그들은 근대를 넘어 현대에서도 존재했다. 오만할 권리까지 살 수 있었던 그들은 더 이상 부러지지 않는 ‘다이아 수저’를 가지게 되었다. 자본주의 체제하에 살고 있는 우리가 그들을 비판할 수는 없다. 하지만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면 한 번쯤 질문을 던져볼 수는 있을 것이다. 오만의 권리는 부자의 권리인가? 가난한 자의 권리는 어디에 있는가?

소설 오만과 편견

‘우리 모두는 가면을 쓴다.’

소설 속에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 편견이고, 다른 사람이 나를 사랑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 오만이다.”라는 대사가 나온다. 이 한 문장으로 책을 설명할 수 있다.

소설 속 엘리자베스는 부자인 다아시의 겉모습을 보고 불쾌감을 느꼈다. 마을의 무도회장에서 숙녀들과 춤을 추지 않고 차갑게 대하는 모습으로 그를 판단했다. 이후 이미지가 박혀버려 다아시의 말과 행동을 관찰하여 오만함을 찾았다. 이웃들의 그를 향한 험담을 할 때면 속으로 동조했다. 자신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람으로서 편견이 아닌 ‘다아시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본 것이다.’라고 말이다. 사람의 단편적인 모습만 보는 것이 아니라 직접 대화하며 오랜 시간을 겪어 봐야 알 수 있다는 언니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자신은 이미 겪어 보았으며 주위 소문을 들어보니 아주 못된 사람이라는 것이다.

소설의 후반부에 다아시 소문의 실체가 밝혀지고 엘리자베스는 미안함과 충격의 눈물을 흘리게 된다. 자신의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라는 페르소나 -‘가면’을 나타내는 말로 ‘외적 인격’ 또는 ‘가면을 쓴 인격’을 뜻함- 가 벗겨졌기 때문이다.

각자의 엄격한 잣대를 상대에게 겨누고 판단한다. 판단이 끝나고 나면 상대에 맞는 가면을 쓴다. 상대를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대화도 나눠보지 않은 채 말이다. 그 가면 속에는 상대에게 절대 들키면 안 되는 비밀처럼 편견을 간직하고 있다.

편견은 드라큘라와 같다. 어떤 강한 총탄에도 없어지지 않는다. 오직 강력한 진실의 은탄을 마주했을 때, 비로서 사라지고 만다.

‘신중함과 탐욕 그 경계 어딘가’

“결혼에 있어서 돈만 밝히는 것과 신중한 것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 거죠? 신중함이 끝나는 지점은 어디고 탐욕이 시작되는 지점은 어딘가요?” 엘리자베스의 물음은 읽는 독자로 하여금 생각하게 만들었다.

등장인물 속 샬럿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엘리자베스를 좋아하던 부자이지만 오만한 남자와 곧바로 결혼했다. 이에 엘리자베스는 물질만 보고 결혼을 선택한 샬럿을 비난한다. 신중하게 생각하지 않고 본능에 충실한 선택을 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항상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답이 정해져 있지 않은 어두운 길목에 서있을 때, 실리에 충실한 선택을 한다면 비난을 받게 된다. “충분히 생각하고 결정해야지.”, “욕심이 아닌 이성적으로 생각해.” 등등 많은 조언이라는 미명 하에 비난을 듣게 된다.

신중함은 탐욕의 반대말이 아니다. 실리적인 선택을 했다고 해서 신중함이 빠졌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실리적인 선택을 한 이들에게 탐욕적, 본능적이라는 벗을 수 없는 갑옷을 입힌다.

또 하나의 문제는 신중함과 탐욕을 선택할 수 있는가이다. 샬럿은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고 신분 또한 보잘것없다. 샬럿에게 선택권이 있었는가 하는 문제이다. 샬럿이 엘리자베스의 집처럼 중산층이었다면 선택이 바뀌었을 수도 있다. 가난은 선택의 기회를 주지 않는다. 선택의 기회는 언제나 오만할 권리가 있는 자들의 몫이었다.

‘오만과 편견을 읽고’

한때 고전 명작에 빠져 ‘데미안’, ‘호밀밭의 파수꾼’,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프랑켄슈타인’ 등 며칠 동안 굶주렸다 음식을 먹는 맹수처럼 책들을 읽었다. 고전 명작들을 읽다 보면 다른 세계가 정말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 정도로 책에 빠져들어 영혼이 다른 세상에 존재하는 느낌이다.

오만과 편견은 고전이지만 정말 재미있다. 일상과 연애 우리 모두가 좋아하는 내용이 아닐까 싶다. 유쾌한 이면에서 풀어내는 사회적 문제들은 독자들에게 맡기고 있다. 그래서 19세기 당시 독자들도 열광했을까 짐작을 해본다.

가볍다면 가볍고 무겁다면 무거울 수 있는 내용을 담은 이 책을 읽고 한동안 많은 생각에 빠져있었다. 오만과 편견은 인간관계와 불가분의 관계이다. 그렇다면 일상 속에서 마주해야 한다는 말인데 과연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의 이야기이다. 정답은 없다. 내가 생각하는 방안은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아닐까 싶다. 오만과 편견은 서로를 잘 모르기 때문에 생기는 오해이다. 엘리자베스가 다아시의 말을 진심으로 듣고 진솔한 이야기를 했다면 소설의 이야기는 바뀌었을 것이다. 소설의 이야기를 가슴에 품고 이제는 내 이야기를 바꾸기 위해 살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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